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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Veronic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회   작성일Date 25-08-1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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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산가라오케 나는 보통 사람보다 음악을 많이 아는 편이다. 가요, 팝송, 고전 음악, 국악, 샹송, 칸초네 등 세상의 모든 음악을 두루 안다. 남보다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직업도 방송사 라디오 PD여서 음악 들을 기회도 많았다. 하루 종일 수많은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 라디오에서는 참으로 다양한 음악들이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앱을 깔면 비행기 안에서도, 산 위에서도, 바다에서도, 외국에 나가서도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들을 수 있다.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아직도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경기도 일산에서는 아파트에서 라디오로 라디오 방송을 듣다 보면 잡음이 많이 들린다. 듣는 장소에 따라 수신 상태가 다르다. 안방에서는 잘 들리다가도 화장실에 가면 안 들리기도 한다. 방송사마다 수신 상태가 다르다. KBS 라디오가 잘 들리다가도, 어떤 날은 MBC 라디오가 잘 들리고, 또 어떤 날은 CBS 라디오가 잘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내 서재에서는 아예 제일 잘 들리는 CBS 음악 FM을 고정으로 듣고, 화장실에 갈 때는 스마트폰 앱으로 KBS 클래식 FM을 듣기도 한다. 저 먼 우주 속으로 탐사선도 띄우는 세상에 라디오 수신도 잘 안 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터널 속에 들어가도, 지하에 내려가도 라디오가 잘 들리지 않는다. 고약한 세상이다. 각설하고, 그런데 요즘 음악에 대한 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난 음악을 들으면 무조건 좋은 줄 알았다.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면 듣지 않는 것보다 나은 줄 알았다. 음악이 사람들의 정서를 순화시켜서 선한 마음을 갖게 할 줄 알았다. 사람들이 좋은 음악을 많이 들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보다 나아질 줄 알았다. 그래서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한테 제발이지 음악 좀 많이 들으라고 충고하기도 하고, 권하기도 하고, 압력을 넣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다 허망虛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음악을 듣는 양으로만 따지면 지금 사람들은 내가 10대이던 50년 전보다, 20대이던 40년 전보다, 30대이던 30년 전보다 훨씬 많이 듣는다.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나서 비교할 수가 없다. 옛날에 타던 완행열차나 비둘기호와 지금의 KTX와 비교하는 것 이상이다. 예전에 타던 유원지의 오리 배와 지금의 초대형 호화 유람선과 비교하는 것 일산가라오케 이상이다. 맞다! 어린 시절의 조그만 연못과 지금의 드넓은 태평양과 비교하는 것 정도는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사람들이 접하는 음악의 양은 엄청나게 늘었다. 사람들이 스마폰에 저장한 음악은 앞으로 몇십 년을 들어도 다 못 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사람들이 예전보다 착해졌는가? 예전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하는가? 예전보다 남을 배려하는가? 사람들은 정이 없어졌고, 각박해졌고, 살벌하기까지 하다. 학교나 직장이나 군대에서는 선량한 사람을 지독한 왕따를 시키고, 사소한 일로도 얼굴을 붉히며 싸우고, 잔인한 범죄를 스스럼없이 저지른다. 그렇다면 사람의 정서를 순화시킨다는 음악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음악은 정말 그 정도로 무용한가? 음악은 정녕 백해무익百害無益한가? 영어 속담에 ‘Easy Come, Easy Go.’라는 말이 있다. ‘쉽게 오면, 쉽게 간다.’는 말이다. 뭐든지 쉽게 얻으면, 쉽게 잃는다. 돈도 그렇다. 복권에 당첨되어 일확천금一攫千金한 사람들의 뒷얘기는 다 씁쓸하다. 사랑도 그렇다. 쉽게 다가온 사랑은 상처만 남기고 쉽게 떠나가는 법이다. 음악도 그렇다. 예전에는 음악을 들으려면 라디오보다 큰 배터리를 사서 라디오에 연결해서 들었다. 듣고 싶은 LP를 사기 위해서 용돈을 모으기도 했다. 그렇게 산 LP를 홈이 파일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신청곡을 듣기 위해서 엽서에, 편지에 정성껏 사연을 써서 방송사에 보내기도 했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음악을 듣거나 스마트폰에 앱을 깔아서 듣고 싶은 방송을 골라 듣기도 한다. 사연도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쉽게 보낸다. 음악 듣기가, 음악 접하기가 너무 쉬워졌다. 그러니 음악에 대한 고마움이 없다. 깊은 감동이 없다. 영혼의 울림이 없다. 어디 음악뿐인가. 우리는 너무 흔하거나 늘 존재하는 것들에 무심하다.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 소중함을 모른다. 우리가 늘 숨 쉬고 있는 공기가 그렇다. 사람들은 공기의 고마움을 모른다. 며칠 동안 미세 먼지에 고생하고 난 뒤에야 깨끗한 공기의 고마움을 겨우 느낄 뿐이다. 물도 그렇다. 사람들은 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지금도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는 아낙네들이 물 한 동이 길으려고 몇 시간을 걸어가서 물 한 동이 길어서 머리에 이고 몇 시간을 걸어서 돌아온다. 그 귀한 물 한 동이로는 우리나라 사람 한 사람의 머리도 못 감을 일산가라오케 것이다. 우리는 정말이지 물을 너무 흥청망청 쓰고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 물이 일주일만 나오지 않는다고 해 보자. 그럼 과연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이 땅은 거대한 똥 덩어리로 변할 것이다. 물이 나오지 않는 수세식 화장실은 그야말로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예전의 재래식 변소는 물이 안 나와도 끄떡없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는 화장실은 물이 안 나오면 들어갈 수가 없다.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 볼일을 볼 것인가. 밖에 나가서 개들처럼 다리 들고 볼일을 볼 것인가? 그러니 불과 몇 시간도 안 돼서 이 땅은 똥과 오줌으로 뒤범벅이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해는 또 어떤가? 달은 또 어떤가? 바람은 또 어떤가? 나무와 꽃은 또 어떤가? 구름은 또 어떤가? 그늘과 응달은 또 어떤가? 땅은 또 어떤가? 길은 또 어떤가? 비와 눈은 또 어떤가? 산과 바다와 강은 또 어떤가? 각설하고, 어떤 사람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예전보다 더 폭력적이 된 것을 컴퓨터 게임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게임을 하는 바람에, 컴퓨터에서 걸핏하면 총 쏘고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잔인해졌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요즘 아이들은 틈만 나면 컴퓨터 게임을 한다. 집에서도 하고, PC방 가서 하고, 스마트폰으로도 한다. 나는 컴퓨터 게임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아이들이 즐기는 것은 전쟁놀이가 아닐까 싶다. 전쟁놀이 정도가 아니다. 잔인한 살상을 밥 먹듯 하는 ‘워 게임War Game’이다. 게임만 하면 한 번에 수백 명을 죽이는 그런 잔인무도殘忍無道한 게임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폭력적이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도 있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도 있다. 예전에는 밖에서 돌아다니면서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소풍 가거나, 친구들과 놀러 가서 ‘야전野電’을 틀어 놓고 춤추는 것이 고작이었다. ‘야전’은 ‘야외용 전축野外用電蓄’을 줄여서 부르던 은어隱語로, 당연히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그 시절 우리만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워크맨이 보급되면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음악을 들을 수 일산가라오케 있었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이어폰을 끼고 워크맨을 들었다. 워크맨은 가격이 만만치 않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살 수도 없었다. 화중지병畵中之餠, 그림의 떡이었다. 초기에 소니의 워크맨을 휴대했던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저가의 국산 워크맨 짝퉁이 나오면서 대중화되었다. 그때는 카세트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해서 친구나 지인들한테 선물하면 받는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다. 그러다가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음악을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고, 앱을 깔아서 라디오도 아무 데서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아니더라도 요즘에는 소형 라디오도 많이 나와서 나이 든 사람들은 소형 라디오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듣기도 한다. 그런데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든지, 라디오 방송을 듣든지, 라디오로 라디오 방송을 듣든지 점점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이 제멋에 취해 볼륨을 너무 크게 틀어 놓고 듣는다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도, 전철을 타도, 엘리베이터를 타도, 산에 가도, 바닷가를 가도, 낚시터를 가도 볼륨을 크게 해서 듣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본인은 이어폰을 끼고 들으면 다른 사람한테 안 들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한테 다 들린다. 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소음이 된다. 그 음악이 록 음악이나 댄스 음악이면 그 폐해가 더 크다. 본인은 즐겁게 들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한테 소음으로 들리면 문제가 있다. 문제를 넘어서 남한테 피해를 준다. 나한테 아무리 좋은 음악도 남한테는 시끄러운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아침에 안 좋은 일로 가족과 언성을 높이고 나온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누군가의 이어폰에서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록 음악은 차라리 고문에 가깝게 들릴 것이다. 나도 음악을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볼륨을 크게 해 놓고 듣지는 않는다. 아, 있기는 있었다. 양평동에 살 때인데 윗집 복福이 없었다. 윗집은 이상하게도 자주 바뀌었는데 이사 오는 집마다 노래를 부르거나, 쿵쿵거리는 등 생활 소음이 심했다. 처음에는 직접 가서 얘기도 하고, 인터폰으로 항의도 했지만 전혀 시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저급한 인간들하고 싸우기 싫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묘책이 전축 크게 틀기였다. 나는 윗집에서 소음이 들리면 무조건 전축을 크게 틀었다. 가요나 팝을 트는 것보다 클래식을 틀어 대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사람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아픈 감정을 치유해 주는 일산가라오케 클래식이 윗집의 소음 대비 음악으로, 소음을 징벌하는 음악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면 악다구니 같던 윗집도 조용해졌다. 지나고 보니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다. 수양이 부족해서 이웃들의 소음을 참지 못했던 내가 부끄럽기만 하다. 아마 말은 안 했어도 옆집이나 아랫집에서는 내가 틀었던 음악 때문에 시끄러웠을 것이다. 짜증이 났을 것이다. 각설하고, 나도 예전에는 엘리베이터나 전철에서 볼륨을 크게 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지적을 받았고, 전철 안에서는 나이 든 사람들이 나한테 잔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사람들한테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내 입만 아픈데 해 봐야 뭐할 것인가. 그러다가 성질 고약하거나 까칠한 사람들 만나면 십중팔구十中八九 우격다짐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나도 이제는 싸우는 데 지쳤다. 이제는 편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전철 안에서 핸드폰으로 시끄럽게 통화하는 인간들도 그냥 내버려 둔다. 자신들의 무례한 행동이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대뜸 대드는 인간들하고 말다툼해 봐야 나만 피곤할 뿐이다. 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나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 가난한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 표정이 의외로 행복하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나라의 국민들이 착하고 순박하다. 그런 나라에는 전기도 잘 안 들어오고, TV도 볼 수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음악을 들을 수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의 표정이 천사같이 해맑다. 보고 싶은 것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으니 아무런 욕심이 없다. 비교할 것이 없으니 마음이 편하다. 그런 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잘 사는 나라보다 훨씬 높다. 아이들의 표정도 마냥 행복하다. 엄마의 잔소리도 없고, 숙제도 없고,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고, 입시도 없으니 하루하루가 마냥 행복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명의 이기利器가 사람을 더 불편하게 할 때가 많다. 문명의 혜택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산골에서 음악이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음대 교수보다 불행한 것은 절대 아니다. 방음이 잘 된 방에서 매일 클래식을 듣는다고 그 사람이 남보다 인격이 고상하고, 일산가라오케 친절하고, 착하고, 상냥한 것은 아니다. 가요든, 팝이든, 클래식이든, 가수든, 작곡가든, 지휘자든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다 착한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가수들 가운데도 착한 사람도 있고, 기본이 안 된 인간도 있고, 눈 씻고 봐도 싸가지라고는 전혀 없는 인간도 있다. 음악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타고난 성품이 선한 사람은 음악을 듣지 않아도 착하게 살 것이고, 저급한 DNA를 물려받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음악을 많이 들어도 나쁜 짓을 하면서 살 것이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노래방이 지천至賤이다. 어디 노래방뿐인가. 가라오케, 단란주점, 룸살롱 등 노래 부를 수 있는 곳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래를 엄청나게 불러 댄다. 각종 경연 대회도 여기저기서 열린다. 얼마 전 작고하신 송해宋海(1927~2022) 선생이 MC로 활약하시던 ≪전국노래자랑≫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심에 도전하고, 본선에 나와 노래를 불렀는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 낮에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전국노래자랑≫을 시청했는가. 방송사마다 벌이는 노래 경연 대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당 프로그램을 시청했는가. 가히 대한민국은 ‘노래 공화국’이라고 할 만하다. 아마 모르긴 해도 어린 학생들한테 장래 희망 사항을 물으면 다른 직업보다 가수가 되겠다는 대답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이렇게 노래에 묻혀서 살고 있는데 나라는 왜 만날 시끄러운가. 진보다 보수다, 좌다 우다, 촛불이다 태극기다, 이십대 남이다 이십대 여다, 노조다 비노조다, 여다 야다 하면서 서로 상대를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나라에서 만날 싸움박질하느라 세월 다 보낸다. 하기야 그렇게 상대를 헐뜯고 싸우느라 스트레스가 쌓였으니 노래도 듣고, 노래도 부르면서 화를 삭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기는 하겠다. 허허허…… 그렇다. 좁은 땅, 소란스러운 나라에서 사느라 골병드는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데는 그나마 음악을 듣고, 노래 부르는 것이야말로 만병통치약萬病通治藥이다. 음악이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에서 똑똑히 보았다. 주인공 앤디[팀 로빈스Tim Robbins(1958~ ) 분分]가 교도소 사무실의 문을 닫아걸고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에 나오는 아리아 ;은 스피커를 통해 교도소 내의 운동장과 작업장으로 울려 퍼진다. 그 자리에 있던 죄수들은 처음에는 의아해했지만 이내 일산가라오케 귀를 기울여 그 노래를 듣는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그랬다면 죄수들이 ‘당장 저 노래 끄라!’며 소동을 벌였겠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들은 잠자코 그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노래를 듣는 그 짧은 순간이나마 자유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 노래를 통해 어둡고 우울한 현실에서 일탈逸脫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쇼생크 탈출≫에서 난 오페라 아리아 한 곡으로 사람들에게 자유를 꿈꾸게 해 주는 노래의 마력을, 음악의 신비를 볼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지방에 출장 갈 때면 카세트테이프 몇 개에 내가 좋아하는 팝송을 녹음해서 가지고 다녔다. 지방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고속버스 안에서, 시외버스 안에서 나는 워크맨에 이어폰을 꽂아서 그 노래들을 듣고 또 들었다. 그 노래들은 일상에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을 천천히 위로해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수십 차례의 지방 출장 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음악을 듣다가 책을 읽다가 하면 어느새 목적지에 닿았다. 음악은 다정하고도 진정한 반려자였다. 앞에서 음악의 위대함을 조금 깎아내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절대로 음악 탓이 아니다. 시대 탓이요, 사회 탓이요, 사람 탓이다. 고도의 물질문명이 판을 치는 시대,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사회, 갈수록 이기적이고 개인적이 되어 가는 사람들 탓에 음악의 순기능이 점점 그 위상을 상실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노래가 많았는데, 요즘은 갈수록 그런 노래가 드물다. 노래 자체가 표피적이고 감각적이 되어 가는 면도 있지만, 감성적인 노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예전처럼 물렁물렁하지 않다는 것이 더 큰 이유다. 사람들 마음이 바위처럼 견고해져서 어지간한 노래에는, 음악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저 춤과 군무群舞와 힙합 스타일과 랩에 열광할 뿐이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은 흘러간 노래, 1970~80년대의 노래, 올드 팝,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의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욕먹을 소리인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나라 아이돌의 음악이 조금도 와닿지가 않는다. 하기는 요즘 세대는 또 흘러간 노래들이 하나도 감흥이 없을 것이다. 정치도 세대 간에 갈등이 많지만 노래도 그렇다.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음악이 필요한 시대다. 각설하고, 음악을 듣지 않는 것보다는 음악을 조금이라도 듣는 것이 사람에게는 삶의 일산가라오케 활력소가 된다. 우울할 때, 슬플 때, 절망할 때, 시름에 빠졌을 때 곁에 아무도 없다면 음악이 커다란 위로가 된다. 식물도 차분하고 밝은 음악을 들려주면 성장이 더 빠르다는데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 모두 틈나는 대로 열심히 음악을 들을 일이다. 혼자만 듣지 말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식에게, 친구에게 음악 듣기를 권할 일이다. 따분하고 건조한 일상 속에서 그나마 윤활유가 되어 줄 음악을 듣자고 알려줄 일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음악을, 노래를, 제목을, 가수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0대와 20대에는 한두 번만 들으면 다 기억했었는데 요즘은 심한 경우에는 열 번을 들어도 제목이나 가수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클래식은 더 심하다. 그러니 너무 노래 제목이나 부른 가수 이름에 연연하지 않을 일이다. 거기에 너무 매이면 음악 듣다가 스트레스가 쌓인다. 자, 오늘도 당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열심히 들을 일이다. 여러분의 기분 상승을 위해서,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열심히 음악을 들읍시다! 음악이여! 영원하라! 비바! 뮤직! PS : 앞에서 소개한 ≪피가로의 결혼≫ 중 ;은 역시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가 틀어 주는 낡은 LP처럼 군둘라 야노비츠와 에디트 마티스의 버전으로 들어야 제격이다. 음악은 역시 아는 만큼 들린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음악은 그냥 들어도 좋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공부하면 더 잘 들을 수 있다. 더 재미있게 들을 수 있다. 더 감동을 느끼며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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