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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선생의 변 / 유공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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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HELLO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회   작성일Date 25-05-24 17:19

    본문


    그냥 세파킬 효과 선생의 변&nbsp/&nbsp유공희
    &nbsp
    며칠 전에 10년 전의 제자라고 하는 S군이 이곳 모 고등학교로 부임했다고 방문해 온 일이 있었다.
    남성다운 체격에 거무스레한 얼굴을 지닌 믿음직한 청년이다.
    제쪽에서 술과 점심을 한턱 하는 자리인데, 내 앞에서 굳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요즘의 젊은이답지 않게 얌전한 위인으로 보였다.
    부박한 세태에 물든 곳이 없는 듯한 게 제법 반가운 일이라고 여기려고 하는 차에 이놈이 불쑥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저, 선생님은 교편을 드신 지가 10년이 넘으셨을 텐데 어째 여태 그냥 선생이세요? 손해를 많이 보신 것 같네요.”
    아닌 게 아니라 나와 같이 교편을 잡기 시작한 친구들 가운데 소위 일류 중․고등학교 교장 급이 허다하니 손해를 많이 본 것이 속일 수 없는 일인 지도 모른다.
    이건 확실히 내 은근히 아픈 곳을 찌른 질문임이 분명하다. 험난한 세파에 이리 저리 밀려만 온 것이 과거의 내 생활이었고,
    또 내 자신 생활력이 극히 빈약한 사바인(娑婆人)이라는 것을 언제나 자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S군의 이야기를 당돌한 망언(妄言)으로 규정해 버리고 만 것이다.
    “자넨 교편을 든 지가 3년이라지. 지금이라도 늦잖네! 그냥 선생 노릇을 싫어하는 사람이 교육계에 들어왔다는 건 대단히 불행한 일일세.”
    S군은 좀 얼굴을 붉힌 듯하더니 변명 같은, 사과 같은 군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런 S군에게 고미소(苦微笑)를 던져 가면서 연거푸 술잔을 받아 마시며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했다. 내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이 이른 바 그냥 선생님의 그 ‘그냥’ 예찬(禮讚)으로 시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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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계산해 넣지 않는다’는 일은 좀처럼 실천할 수 없는 일일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사회생활의 향상을 위해서 이보다 더 중요한 세파킬 효과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계산해 넣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는 비겁한 태도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일’을 위하자는― 그래서 인간이란 생명이란 그 가치 있는 ‘일’을 실현하게 하는 땔감 같은 것이라는 높은 사상과 투철한 용기의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좋은 일을 잘 해 내고 싶다는 정신같이 순수 무사(無邪)한 고운 마음이 또 있겠는가!
    우리의 직업 선택 문제도 여기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한때 신문지상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청년들이 귀국하기를 꺼려한다는 이야기가 실린 일이 있었다.
    적어도 미국에서 학자가 되고 석사가 된 내가 한국 같은 데 가서 무엇이 할 만한 일이 있겠느냐는 타산일 것이다.
    불행이도 그들의 ‘그냥’ 사람으로서의 진실한 자존심이 그 고귀한 미국의 학위라는 것 때문에 딱하게도 병들어 버린 탓이다.
    뒤집힌 눈을 깨끗이 씻고 그냥 사람의 맑은 눈으로 제 조국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살펴본다면 할 일이 산더미같이 드러나 보일 것이 아닌가!
    미국은 한국의 청년이 천재로 갱생하는 곳인가 건너만 가면 김 박사 박 석사가 마구 제조되어 나오는데, 그들이 얻은 것은 학위요 잃은 것은 ‘사람’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아니 가질 수 없는 노릇이다.
    얻은 것은 지위요, 명예요, 재산이요, 그러는 동안에 그 ‘사람’은 차근차근 유린(蹂躪)되고 말았다 하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온 생물이 우리 눈앞에 얼마나 성가시게 우글거리고 있는가.
    이런 생물들이 가뜩이나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행복스럽게 만들기 위한 인생의 픽션의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 무엇이라고 말을 하고 동작을 한다는 것이 짝없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냥 세파킬 효과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요, 따라서 그들은 하늘의 별만치나 많은 죄 없는 그냥 사람들조차 마구 유린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냥 사람이 아닌 사람을 그들이 ‘그냥’을 싫어하는 것만치나 싫어하는 것이며 또 나아가서는 인간이 살고 인간이 다스리는 세계이니만치 인간적이 아닌 모든 것을 무엇보다도 경원(敬遠)하는 것이다.
    우리는 폭력을 미워하고 사람소리 같지 않은 고함소리를 싫어하고 짐승같이 성낸 얼굴을 미워한다.
    나는 일제(日帝)의 학병(學兵)으로 끌려가서 일본 군대 생활을 2년이나 하는 동안에 인간을 온통 짓밟는 도깨비 같은 침략군의 메커니즘 속에서 질식할 듯한 고독을 맛 본 적이 있다.
    왜병들은 나의 말씨와 동작과 표정까지를 싸잡아 ‘정신 상태가 나쁘다’고 호통을 쳤다.
    해방이 된 후 8개월 동안 귀국도 못 하고 있는 동안 같이 학병으로 끌려가서 왜군의 장교가 된 어떤 사람은 나를 ‘창백한 인텔리’라고 욕을 하였다.
    무슨 공산주의자의 넋두리 같은 소리로 들렸지만 나는 정신 상태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창백한 인텔리라고 욕을 들을 만치 그를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똑 같이 무슨 인간 이상의 부당한 파토스의 과열이 있어 나 같은 생각하는 ‘그냥 사람’이 보기 싫었던 것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진실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냥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권리인 것이요, 또 생각한다는 짓은 누구도 괴롭히지 않은 가장 사람다운 일인 것이다.
    그냥 사람이 아니게 될 때에 옳게 생각하는 능력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태리의 명여우(名女優) 줄리에타 마시나가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취미가 무엇이냐 라는 기자의 질문에 “사람과 사귀는 것이다.
    단 평민에 한한다”고 대답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의 주연 영화 『길』이나 『카비리야의 밤』등을 본 사람이면 세파킬 효과 누구나 인생의 행복과 슬픔에 대한 진진한 감명을 받았을 줄 안다.
    또 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에 대한 부당한 욕심을 깨끗하게 씻어내게 해 주는 영화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관객의 가슴속에 인생에 대한 이해 이상의 동정을 흐뭇하게 샘솟게 해주는 그녀의 연기가 높은 지성의 소산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와 같이 언제나 사람들과 따뜻하게 사귀고 싶은 정을 버리지 못 한다.
    염치없게도 거만을 피울지 모르는 모든 착한 그냥 사람들 끼리 말이다….
    인생은 평범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권태 이상의 허무까지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인생의 범용성(凡庸性)이다.
    독일의 세계적인 현대 작가인 토마스 만의 자서전적인 소설 『토니오 크뢰거』 가운데 ‘범용성(凡庸性)의 법열(法悅)’이란 말이 나온다.
    인생에 대한 온갖 감상(感傷)과 욕심을 극복하고 인생의 범용성 그 속에서 하나의 체관(諦觀)을 터득한다는 것으로서 고도의 지성이 획득한 생의 인식이라 할 수 있으며,
    토마스 만의 경우에 그것은 철저한 산문정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인생의 범용성에서 무슨 법열까지 느낀다는 것은 생각하자면 무엇인가 새삼스러운 일이요,
    약간의 파토스의 과열을 표명해 주는 것으로 쑥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진상(眞相)을 진상대로 보지 못하고 필요 이상의 욕심과 감상(感傷)을 짊어지고 무시로 발열(發熱)하는 에고이즘을 휘둘러댄다는 것은 분명히 측은한 동키호테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평범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가 비범한 탓이 아니라 인간 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부족과 사바의 운명에 대한 무식의 표명일 뿐이다.
    무엇인가 유명해지지 않으면 산 것 같지 않다는 무슨 열병에 걸린 듯한 에고의 소유자를 우리는 허다하게 보는 것이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보잘 것 없는 위인이 제 손으로 제 비석을 세파킬 효과 세워 놓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식장에서 하다못해 만세삼창의 선창이라도 얻어 해야만 속이 풀린다는 사람도 있다.
    제 이름 석 자만 가지고는 쓸쓸해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평범과 ‘그냥’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나는 그냥 사람이다 하는 당연한 사실에서 몸부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인생은 또 얼마나 억울한 불행을 겪어야만 했던가!
    Caligula 같은 폭군이나 Hitler 같은 전제자의 정신 상태는 실로 평범과 무명을 견디지 못하는 엉뚱한 열병환자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사람’으로서의 자기의 빈약과 언젠가는 죽어가야 한다는 엄연한 운명에 대한 공포에 항상 전율하고 있으며, 이 공포심과 불안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끔찍한 죄를 범하게 한 것이다.
    그들의 그 살벌한 용기란 실은 한없는 이 공포심의 발작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미소하는 전제자의 얼굴을 상상할 수 없다.
    미소는 자족(自足)의 표정이요 평범한 인생을 에누리 없이 받아들이면서 조금도 불안이 없는 마음의 징표인 것이다.
    발열(發熱)하는 에고가 아니라 그윽하게 미소하는 그냥 사람의 자약(自若)한 눈에 인생은 얼마나 다정하게 샘솟는 행복의 앞뜰처럼 비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열병에 걸리지 않은 그냥 사람들과 서로 따뜻하게 사는 즐거움과 슬픔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래서 멋없이 평범한 인생도 열병환자들이 알지 못하는 한없는 멋과 즐거움을 간직한, 꽃밭처럼 보금자리처럼 우리 그냥 사람들의 티없는 마음 앞에서는 향기도 그윽하게 무르익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서로 주고받을 진실한 이야기 거리가 많은 것이다. 서로 생각해 볼 일이 많은 것이다.
    할 일이 많은 것이다.
    교편을 든 지 10여 년 그냥 선생으로 지내온 동안 나는 세파킬 효과 이러한 일들을 더 절실하게 느껴 왔다.
    또 그 동안 그냥 선생이 아닌 선생들을 허다히 보아 왔다.
    보아 오는 동안 그들 가운데는 ‘사람’으로서 실격해 가는 사람이 더 많더라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그냥 선생이야말로 훨씬 선생으로서의 보람이 크다는 사실을 체험해 버렸다.
    첫째 50분 동안의 수업시간이 없으면 선생 노릇하는 맛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수십 명의 젊은 놈들이 샛별 같은 두 눈을 뜨고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정신을 모아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앞에서 티 없이 꽃 피는 사상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효과야 10년 후에 또는 100년 후에 열매를 맺을지 알 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에다 모든 것을 기대하는 그러한 욕심쟁이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 대하지 못 하는 선생이란 터무니없는 이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젊은 학생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자신의 모호했던 사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나는 나의 수업시간 중에 내가 쓰고 싶은 글의 테마를 발견할 때가 많다.
    이것 또한 그냥 선생이 차지할 수 있는 알뜰한 수확이 아니고 무엇인가.
    셋째로 학생은 실로 미래가 멀고 따라서 인습에 물들지 않은 청신한 사고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다움이 가장 넉넉한 사람들이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또 새로운 인생의 문제와 자주 부딪칠 수 있고 또 새롭게 자라나는 세대를 호흡할 수 있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배우는 즐거움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끝으로 이 진진한 50분 세파킬 효과 동안만이라도 먹고 입고 자는 현실 생활의 근심도 깨끗이 잊을 수 있는 것이다.
    10년이 넘도록 어찌 그냥 선생이며 손해를 많이 본 것 같다고 동정을 보낸 S군! 너의 이야기는 이래서 은사에 대한 당돌한 망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만일 그냥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어떠한 이익을 보았을 것이냐?
    도대체 인생이란 게 수지 맞는 장사라고 네게 가르쳤더냐?
    무슨 직업이든 10년이 되면 자리가 잡힌다고 했다.
    고리타분한 직업의 냄새를 풍기란 말이 아니다.
    직업이란 말이 좀 어색하다. ????이 아니라 metier라고 하는 게 좋다고 한 어느 불란서 학자의 말에 나도 동감이다.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아니라 말하자면 자기가 맡은 일을 통하여 더욱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사람의 참 삶을 깨달아 가는 그러한 의의의 직업이란 말이다.
    그 길의 명장(名匠)이 되어 가는 그러한 뜻의 직업이란 말이다.
    배가 불러지면서 차츰 사람을 안 닮아가는 그러한 부패의 여정(旅程)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상실해 가는 이른바 출세 영달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애써서 자기의 말을 꾸준히 해 내 가면서 참 삶의 사랑을 터득해 가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일본과 서울을 다녀간 세계적인 첼리스트 피아티골스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가 동경(同庚) 상야(上野)음악학교에 와서 첼로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하더란 이야기다.
    “첼로는 손가락으로 키는 것이 아니다. 사상으로 킬 줄 알아야 한다. 보라 나는 손가락으로만 키지 않는다.” 하면서 손굽으로 한 멜로디를 곱게 켜 보이더라는 것이다.
    손굽으로 멜로디를 켜 보인 재주가 멋진 것이 아니다.
    한결같이 첼로에 정진하는 동안 그가 실로 깊은 사랑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첼로가 아니고 한 세파킬 효과 개의 피리라도 좋다. 피리 한 개를 통해서 그는 삶의 오의(奧義)를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국한(局限)은 무한(無限)으로 통한다는 이야기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 개의 피리를 통해서 한 자루의 분필을 통해서 인생의 참뜻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자기의 개성을 비인간적인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비속한 처세술로 거세(去勢)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성을 높일 대로 높이어 순수한 인간성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이야기다.
    사람으로서 죽을 때까지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은 고귀한 인간성과 고상한 사상에 대한 동경심인 것이다.
    인간성을 떠난 천재, 사상이 없는 투지(鬪志)― 그것은 허공에서 발버둥치는 광기(狂氣)요, ‘인간’을 유린하는 폭력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아까 이야기한 불란서 문학가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천재여! 처자(妻子)를 등에 업고 단 하나밖에 없는 너의 길을 접어들 제 그때 비로소 그대의 고통은 땅 위를 피땀으로 물들이게 되며 ‘국한은 무한으로 통한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될 터이다.”
    이 땅을 피와 땀으로 물들이면서 하나밖에 없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 여기에 삶의 오의(奧義)를 깨닫는 길이 트이는 것이다.
    S군! 내가 손해 본 것이 무엇일까? 그
    대는 10년이 넘은 그냥 선생을 어떻게 인식하는 것인가? 자네가 그냥의 참됨을 알게 될 때 다시 한잔 마시자.
    ‘그냥’을 업신여긴다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도 지극히 죄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또 이야기하자.
    발열(發熱)하는 에고의 광기가 아니라 그윽하게 미소하는 ‘그냥 사람’의 평온을 배우자.
    그들과의 허튼 생각이 없는 생활에서 삶의 참 즐거움을 누리어 살아가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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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S군은 나의 이 장황한 ‘그냥 선생’의 뇌까림을 어떻게 들어주었는가?
    나란히 거리로 나오면서 그는 이렇게 어물거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조금도 안 변하셨네요.” 세파킬 효과 …Nil Admir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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