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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10000] 자동 응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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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Phil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회   작성일Date 25-04-26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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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람이 자동응답기 5분 단위로 지겹게 울어댔다. 분명 알람은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다. 수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내 포기하고 아이폰을 올려둔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둥근 모서리의 정지 버튼은 지치지도 않고 반짝였다. 발작하듯 울리는 아이폰을 잠재우니 밀도 높은 정적이 무겁게 깔렸다. 아이폰 액정 모서리가 깨져 있었다. 어디서 떨어 트린 걸까.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건져 올릴만한 단서가 없었다. 늘 칠칠치 못하다고 타박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수현이 어기적대며 거실로 나왔을 때 황금 햇살이 가득 차 있었다. 반쯤 열린 거실 창 사이로 기분 좋은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하얀색 시폰 커튼이 욕심껏 바람을 머금고 풍만하게 부풀었다. 정수기에 머그컵을 놓고 찬물을 가득 따랐다. 끊지 않고 한 번에 들이켜니 몸속 실핏줄 하나까지 반짝하고 켜졌다. ‘엄마가 찬물은 몸에 나쁘댔는데’ 부질없는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소파 앞 커피 테이블에 구닥다리 자동 응답기가 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유선 전화기에 심지어 자동 응답기까지 쓰냐고 웃었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엄마의 결혼 혼수였다. 엄마는 자동응답기 새벽같이 출근을 했다. 광역버스와 지하철과 마을버스에 시달리며 사무실에 도착하면 의식처럼 제일 먼저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겼다. ​삐익- 1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일어났니? 미역국은 끓여 놨는데 불 올려서 한 번 데우고 반찬은 봄나물 많이 났더라. 변할까 싶어 무친 거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까 꺼내서 먹고. 귀찮다고 대충 때우지 말고’ ​그 흔한 사랑한다느니 오늘 하루 잘 보내라느니 하는 달콤한 멘트 한 마디가 없다. 무슨 엄마 딸 사이가 이럴까 싶었다.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락앤락 통이 젠가같다. 어설피 뽑았다가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멍하니 바라보던 수현은 어제 마시다 넣어 둔 아이스 아메리카노 테이크 아웃 잔만 꺼냈다. 얼음이 전부 녹아 싱거웠다. 걸레 빤 물 같았다. 소파에 걸쳐 둔 후드를 입고 집을 나섰다. 편의점 커피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고요했다. 개미 새끼 하나 볼 수 없다는 진부한 표현이 떠올랐다. 아파트 단지와 인접한 이면 도로에 한대의 차도 없었다. 멀리 사거리를 지키는 신호등만 자기 자동응답기 역할을 하느라 붉은 신호와 푸른 신호를 갈아 끼웠다. 편의점은 무인판매 시간을 넘겼는데도 점원이 보이지 않았다. 신용카드를 유리문 입구 결제대에 꽂았다. 미끄러지듯 유리문이 열렸다.​커피를 내리며 주위를 살폈다. 사람이 없는 것만 빼고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매대에는 물건이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스크린은 줄기차게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바닥은 막 청소를 끝낸듯 유리알 같았다. 홀더를 끼운 커피를 들고 무작정 걸었다. 사거리를 벗어나 간선도로까지 걸어갔다. ‘삼보 이상 드라이브’라고 외치며 어떤 상황에도 차를 끌고 다니는 수현이었다. 하지만 후드 주머니에 넣어뒀다고 생각했던 자동차 키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금방 사위가 어둑해지며 어스름이 깔렸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 퇴근하고 남을 시간인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 모서리가 깨진 아이폰에 투영된 엄마의 프로필 사진이 자글자글했다. 신호음은 연결 할 수 없다는 기계음으로 바뀌었다. 수현은 질식하리만치 작은 유리상자에 갇힌 압박감을 느꼈다. 손을 뻗거나 허리만 펴면 금방 벗어날 수 있는 유리상자인데 탈출할 수 없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웅크리고 자동응답기 있었다.​날이 밝았다. 익숙하게 울리는 알람에 소스라치며 깼다. 부은 눈두덩을 비비며 살펴 보니 늘 그렇듯 침대에 누워 있었다. 꿈이었을까? 아이폰은 협탁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거실로 뛰어나가 자동응답기 버튼을 눌렀을 때 예의 엄마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일어났니? 미역국은 끓여 놨는데 불 올려서 한 번 데우고 …귀찮다고 대충 때우지 말고’ 제기랄 알겠다고 알겠으니까 지금 엄마 어디에 있냐고? 자동 응답기의 재발신 버튼을 눌렀지만 엄마에게 연결되지 않았다. 무한루프 도돌이표 속에 갇혔다.​아이폰 액정화면 속 날짜는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어제 겪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엄마는 아침밥을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를 했고 사방은 텅 비어 있었다. 편의점에서 햇반을 집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차마 엄마가 해 놓았다는 반찬을 꺼내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세 통 꺼내 가방에 집어넣었다. 2+1 행사라고 했으니 세 통을 가져가야만 할 것 같았다.​누구든 사람을 찾아야 했다. 어제와 같은 곳을 걷는데 전날 분명 없었던 차를 발견했다. 가로수를 들이박고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는 차는 본네트에 자동응답기 잿빛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방금 사고가 났다면 안에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다가갔다. 엉망진창인 운전석은 피범벅이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에어백이 대시보드에 가죽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붉은 피가 파동을 그리며 차량 내부에 수를 놓았으나 좌석은 일말의 무게감이 없었다. 일부러 만든 촬영용 소품 같았다.​오렌지빛 노을이 텅 빈 지평선에서 퍼져나갔다. 가로등이 일제히 불을 밝혔지만 황량했다. 가로등을 제외한 모든 무대는 암전되었다. 고층건물도 상가도 아파트 단지도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불빛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수현을 덮쳤다. 집으로 돌아와 켤 수 있는 모든 불을 켰다. 칠흑 속 등대 같지 않을까. 엄마가 이 빛을 보고 어서 돌아와 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까무룩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아침이다. 여러날이 지나며 수현은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럭저럭 견딜수는 있었다. 냉장고에는 엄마가 채워놓은 반찬이 가득했고 몇발자국만 나서면 언제든지 수현을 반기는 편의점이 있었다. 그리고 자동응답기속 엄마 목소리는 늘 생생하게 자신을 위로했다. ‘안녕 엄마, 자동응답기 출근은 잘 한거지? 반찬은 한가지씩 다 먹어봤는데 끝내주더라’ ​편의점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미세먼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새파란 하늘이다. 비가 오려나보다. 아이스크림 콘같은 구름이 스물스물 다가 오고 있었다. 비라고? 이태껏 늘 맑은 날씨 뿐이었는데.​블랙홀처럼 반복 되는 시간이라고 여겼지만 조금씩 균열은 나기 시작했다. 찌그러진 차에 핏자국은 사라졌고 수현이 아파트 벽에 페이트칠 해 둔 ‘나 살아있다’ 는 문구도 사라지지 않았다. 편의점 매대에 물건도 알게 모르게 구성이 달라지는 것 같다. 망연히 편의점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유리문 밖으로 자전거 한대가 지나갔다. 사람이 타고 있었다. 수현은 커피를 내팽개치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수현 또래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우뚝 서서 자전거를 뒤로 하고 수현에게 천천히 걸어 왔다.​수일을 홀로 지내던 곳에서 그렇게 찾아 헤매던 사람을 만났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탓일까 수현은 바로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울대를 넘기지 못하는 소리만 가래처럼 끓었다. 다행히 그 아이는 침착했다. “내 이름은 지승아야. 결국 만났네”​승아는 갑자기 불어오는 자동응답기 여름바람처럼 상쾌한 아이였다. 수현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꺼워하며 답했다. 음절마다 상쾌한 기포가 터지는 청량함이 느껴졌다. 고독한 시간이 반복되며 바싹 말라버렸던 수현은 마음 저 밑바닥에서 물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음식을 나눠먹고 웃고 떠들며 장난을 치는 일상은 여행 같았다. 그리고 자동응답기 속에는 한결같은 엄마가 있었다.​“이 곳이 어디인지 아니?” 승아가 물었다. 수현은 상황의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묻는 것이 의아했다. “우리집이잖아. 금아 아파트”“자동 응답기에 너네 엄마 메시지가 계속 남아있어?”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동응답기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이제 말해 줄 때가 된 것 같아, 내게 남은 시간도 얼마 없고”​ “이곳은 삼도천이야. 삶과 죽음의 경계지. 넌 지금 네 엄마가 붙잡고 있어 떠나지 못하고 있어“ 승아는 읊조리듯 낮은 목소리를 이어갔다. 승아 역시 지금껏 죽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수현에게 메시지를 남겨야 자신도 안식을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수현은 밤새 친구들과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졸음을 자동응답기 이기지 못한 눈꺼풀이 무겁게 닫히는 순간 굉음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던 승아를 짓이겨 버렸다. 걸레조각이 된 두 소녀를 구급대가 긴급하게 응급실로 옮겼지만 의식을 되찾을 수 없었다.​“원망하지 않기로 했어. 남아 있는 가족이 슬픔에 빠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도리가 없잖아. 너도 그만 편안해졌으면 좋겠어” 수현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승아가 앉아 있던 의자는 주인을 잃고 홀로 남아 있었다. 받아 들일 수 없었지만 긴 시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끈질기게 남은 생에 대한 미련이 그 사실을 외면하게 했을 뿐이었다. 다시 홀로 남았다. 수현은 어깨가 뻣뻣해짐을 느꼈다. 잠깐 잊고 있던 불안이 엄습했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속에서 들끓었다. 자동응답기 버튼을 누르니 엄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우리 딸. 어쩜 이리 앙상해졌니. 많이 아프고 힘들지. 엄마 잘 견뎌볼게 네가 편안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남겨진 내용이 이전과 달라졌다. 볼에 타고 흐르는 눈물이 뜨거웠다.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삭제’ 버튼을 눌렀다. -삐이 0개 의 메시지가 있습니다.​심전계의 곡선이 한 줄 선이 자동응답기 되어 화면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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